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슐리펜 계획 (문단 편집) === 계획 시 === 먼저 '42일'이라는 시간 안에 프랑스를 잡아야만 했고[* 교통과 기술이 훨씬 발달한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나치 독일이 프랑스를 무너뜨리는 데는 46일이 걸렸다. 연합군이 어마어마한 삽질을 벌이고 소련이 동부로 쳐들어오지 않았는데도 그렇다.], 프랑스가 러시아에 철도 차관을 제공하면서 러시아의 동원 능력이 향상되어 슐리펜 생전보다도 시간 제한이 짧아졌다. 이 때문에 계획의 유연성이 아주 떨어져 일단 발동하면 멈추거나 바꾸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. 이는 실제 계획(소몰트케의 수정안)을 따를 때 여실하게 드러났다. 제1차 세계 대전 개전 당시 빌헬름 2세가 참모총장 소몰트케에게 계획 변경을 요청했지만, 몰트케는 수많은 시간표로 서로 이은 계획을[* 특히 정교하게 짠 철도수송 계획. 독일 내의 모든 철도역과 [[화차(철도)|화차]] 사용, 각 부대별 이동을 분 단위까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계획하였다. 따라서 한 군데만 건드려도 계획 전체가 마비된다.] 그렇게 단시간 안에 못 바꾼다고 답변하며 계획을 그대로 밀어붙였다. 이 때문에 전쟁이 발발한 그날 밤, 뒤늦게 황제 빌헬름 2세가 [[영국]]과 타협할 수 있으니 군대를 멈추라고 명하자 몰트케는 반쯤 넋이 나가서 "폐하, 이미 시작했습니다."라고 답했다. 이는 이미 멈추지 못할 수준까지 왔다는 뜻이었지만[* 이미 독일 제국군 일부가 [[룩셈부르크]]의 국경을 넘었다.] 당시 기술의 한계로 정밀시계처럼 맞춰놓은 철도사용체계를 멈추는 그 순간, 한 달 동안은 공격은 꿈도 못 꾸고 방어를 위한 열차 동원조차도 불가능해지는 큰 문제가 발생해버리는 것이었다. 이 때 영국과 프랑스가 그 타이밍에 독일로 치고 들어오면 독일로서는 얼마 안되는 기병연대들이 자력행군하는 것 외엔 손도 못쓰고 당할 수밖에 없었다. * 대규모 물자를 [[철도]]로 날라야 하는데, 철군 시 철도 파괴는 상식적으로 하는 일이었고 철도 지점 중 중요한 곳은 [[요새]]가 이미 있는데다 철도 복구 부대는 편성도 제대로 안한 상태였다. 따라서 철도 복구 능력이 전진하는 병사의 속도를 못 따라갔다.[* 철도 복구 부대가 더 많았다 한들, 원래 모든 일은 부수는 게 만드는 것보다 쉬운 법이다. 파괴 공작의 속도를 복구 속도가 애초 따라가기 어려웠을 것이다.] * 계획의 주력이었던 우익부대는 '''도보'''로 벨기에를 관통해서 북부 프랑스와 파리 근처를 지나는 대장정을 펼친 끝에 파리를 포위하는 역을 맡았으나, 짧은 제한시간에 무거운 울 코트에 가죽 장화 신고 소총과 [[군장]] 짊어진 채 매일 [[마라톤]] 풀코스를 전투하면서 도보전진한 사람이 이 모든 것을 끝내고도 멀쩡할 리가 없었다. 끝내 파리 근처까지 온 독일 제국군 병력은 전투 이전에 이미 제대로 걸을 힘도 없었다고. 위의 계획도만 봐도 1군, 2군의 기동거리가 대략 400km 이상인데 이 거리를 병력교체도 없이 전투하고 행군하며 또 전투하고 가야 한다. * 공간이 없다. 우익부대는 계획의 성패를 좌우하는 주력이라 병력의 규모가 컸는데, 규모에 비해 지나갈 곳(네덜란드, 벨기에, 아르덴 산림지역)은 지나치게 좁았다.(이 때문에 조프르의 [[제17계획]]도 프랑스 북부 지역엔 병력을 거의 배치하지 않았다.) 도로망도 모자랐지만 무엇보다도 벨기에 및 프랑스 국경선 일대가 너무 좁아서 문제였다.[* 이 문제는 2차 대전 초반부 [[나치 독일]]이 [[프랑스 침공]]을 준비할 때도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.] 이는 우익 강화에 장애물이었고, 나중 소몰트케의 우익 약화의 원인이기도 한 문제이다. * [[파리(프랑스)|파리]]. 우익의 1차 목표지는 파리였지만 파리가 점령되더라도 프랑스가 항복한다는 보장이 없는데 독일군에선 이에 대한 고려를 별로 하질 않았다. 그저 피상적으로 파리 점령=프랑스 항복이라고만 생각했을 뿐이다. 게다가 이미 독일은 [[보불전쟁]]에서도 다 이겨놓고 파리에서 시간을 많이 잡아먹은 바 있었다.[* 보불전쟁 개시에서 파리 봉쇄까지는 두 달이 걸렸고 파리를 봉쇄한 후 제대로 항복을 받기까지는 넉달이나 걸렸다. 이미 [[나폴레옹 3세]]의 항복을 받아냈지만 국민들이 반발해서 독일은 다시 싸워야 했다.] 그 사이에 프랑스군이 되돌아와서 독일군을 섬멸할 수도 있는데 이에 대한 고려를 거의 하지 않았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